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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경제와 디자인
_ 윤여경

 
  
01) 공유경제란 무엇인가
 
글을 의뢰받고 '공유경제'를 검색해 보았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공유경제를 이렇게 요약한다. "물품을 소유의 개념이 아닌 서로 대여해 주고 차용해 쓰는 개념으로 인식하여 경제활동을 하는 것을 뜻함." ... 문장이 좀 어렵다. 다행히 본문의 두 번째 문장을 읽으면서 조금 이해가 갔다. "한번 생산된 제품을 여럿이 공유해 쓰는 협력소비를 기본으로 한 경제 방식" 두 문장으로 공유경제를 유추하면, 공유경제란 '나눠 쓰고, 함께 쓰는 경제'를 말하는 듯싶다. 그러고 보니 공유경제를 영어로 'Sharing Economy'이고, 한자로 共有經濟이다. 영어로는 나눠 쓰기(Sharing)를 강조하고, 한자로는 함께 쓰기(共有)를 강조하는 셈이다.
 
오프라인 공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확실하다. 때문에 기존 시장경제의 기본은 '선택'이다. 한집에 냉장고가 10개씩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소비자는 여러 냉장고 상품의 장단점을 꼼꼼히 따져 자신에게 적합한 제품을 선택한다. 선택하는 순간 다른 제품들은 자동으로 포기되는 셈이다. 이렇듯 기존 경제시스템에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어떤 상품(혹은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를 선택하는 순간 다른 상품은 포기된다. 그런데 공유경제는 이 선택과 포기의 과정을 겪지 않는다. 가령 냉장고를 공유하는 플랫폼이 있다면 굳이 하나의 제품을 고를 필요가 없다. 이 플랫폼을 활용하면 다양한 냉장고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니까.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내가 타고 싶은 자동차를 거대한 돈을 주고 굳이 구매할 필요가 없다. 자동차를 공유하는 플랫폼을 활용하면 언제든 타고 싶은 차를 탈 수 있다. 이렇듯 공유경제는 모든 상품을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다. 함께 사용하면 되니까.
 
'나눠 쓰고 함께 쓴다'는 말은 참 좋아 보이지만 모든 상품을 나눠 쓰고 함께 쓰기 어렵다. 나눠 쓸 수 있는 상품과 그럴 수 없는 상품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옷이나 자동차는 나눠 쓸 수 있지만, 옷장이나 운전면허증은 나눠 쓰기 어렵다. 또 상품에 따라 나누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빌려주는 장난감이나 영화관처럼 희소성이 있는 물건이나 한정된 공간은 서로 순서를 정해야 하고, 공기나 물처럼 풍족하면 모든 사람이 동시에 함께 쓸 수도 있다. 또 내가 쓰고 남은 것, 갖고 있는데 지금 사용하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눠쓰거나 바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분류하고 나니 공유경제를 표방하는 플랫폼들의 나누기 방식이 조금 이해된다. 차량 보유의 한계가 있는 렌터카 업체는 선착순으로 차를 빌릴 수 있다. 빌리려는 사람이 많으면 빌리는 가격이 높아지고, 적으면 가격이 떨어진다. 웹사이트나 카카오톡 등 디지털 공간은 동시에 함께 쓸 수 있다. 물론 디지털 공간도 사용자가 많으면 접속이 느려지지만 오프라인 공간에 비하면 굉장한 함께 쓰는 범위가 엄청나다. 에어비앤비나 당근마켓과 같은 중고거래 사이트는 갖고 있는 것을 서로 나누거나 바꾸는 방식이다. 이렇듯 공유경제는 상품에 따라 나름의 한계가 있다. 그렇기에 각기 접근하는 방식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선택과 포기'가 아니라 '나눠 쓰고 함께 쓰기'라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가능해졌을까? 렌터카 업체와 같은 공유경제 개념은 디지털 기술이 없었던 과거에도 있었다. 카카오톡은 조금 오래전에 생겼고, 에어비앤비나 당근마켓은 비교적 최근에 생긴 서비스이다. 이런 차이가 있는 이유는 기술 때문이다. 사람과 정보를 연결하는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공유할 수 있는 상품의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나누기 방식이 가능해졌다고 할까. 앞으로 기술이 계속 발달하면 '운전면허증'이나 '신용'처럼 나누거나 함께 쓰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상품도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02) 공유경제와 함께성
 
나눠 쓰고, 함께 쓰기를 추구하는 공유경제는 자원이 부족하고 온갖 환경 쓰레기로 시들어가는 지구 문명에 꼭 필요한 경제 개념이다. 그래서 공유경제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며 앞으로도 계속 장려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최근 이 공유경제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공유경제를 주도하던 거대 플랫폼 사업자들이 기존 경제시스템과 부딪치면서 큰 갈등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또 플랫폼 경영자들과 주주들이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플랫폼 사용에 과도한 수수료를 책정하는 등 기존 자본가들의 계급적 행태도 반복되고 있다. 즉 공유경제를 표방한 플랫폼들이 과도한 이익을 추구하면서 '나누고 함께하는' 공유경제의 기본 가치를 위반하고 있다.
 
일례로 과거 타다(TADA) 서비스가 기존 택시 업계가 부딪쳤다. 타다는 자신들은 택시가 아니라 렌터카 개념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택시와 시장 경쟁을 하는 상황이었다. 택시업계는 타다의 시장 진출에 크게 반발했고, 타다 서비스는 과도한 시장 규제와 비혁신적 태도에 반발했다. 둘 중 누가 옳은가? 생계가 달린 기존 사업자와 편리하고 혁신된 서비스. 두 집단의 주장이 모두 옳은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결론은 타다 서비스가 한발 뒤로 물러나는 방식으로 정리되었지만 이 논란은 우리 사회에 공유경제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었다. 타다의 사례처럼 공유경제는 때때로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불러온다. 그러면 나눠 쓰고 함께 쓰기라는 공유경제의 고유한 가치는 사라지고 온갖 적대와 경쟁에 직면하게 된다.
 
가끔 디자인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디자인은 클라이언트가 자신의 디자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디자이너를 찾아온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의 요구를 잘 수용해 최적의 해결방안을 제시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이런 상황은 늘 디자인 과정이 순탄치 않다. 특히 클라이언트가 디자인 시안에 계속 수정을 요구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 양쪽의 입장이 달라진다. 디자이너 입장에선 나름 최선의 시안을 주었다고 생각하는데 클라이언트가 계속 거부한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클라이언트 입장에선 디자이너에게 충분한 자원과 기회를 주었는데 제대로 일을 못한다고 생각한다. 공통의 목적을 위해 함께해야 할 두 주체가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오랜 경험상 이런 경우 대체로 좋은 디자인이 나오기 어렵다. 둘 중 누가 틀려서가 아니다. 결국 어느 한쪽의 의견만 반영된 디자인 결과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해결책이라고 할까. 디자인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쓰여야 하는데 두 사람의 입장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면 어쩌란 말인가.
 
나는 공유경제가 기존 경제와 구분되는 지점이 함께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공유경제와 디자인은 함께성이란 가치를 공유한다. 함께성은 민주주의 원리 혹은 민주적 권력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에서 힘의 원천은 '다수성'이다. 함께성은 이 다수성을 담보하는 말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특히 시장 경쟁에서 함께성=다수성에 대한 태도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소양이 아닐 수 없다. 시공간의 한계가 분명했던 기존 선택과 포기에 매몰되었던 시장경제에서는 계속 경쟁과 적대를 강조해 왔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시공간의 범위가 확대되고 연결성이 증폭하면서 선택과 포기 이면에 감추어져 있던 함께성의 중요성이 드러나고 있다. 실제로 함께성을 잘 실현한 국가나 기업은 현대 자본주의 시장 경쟁에서 늘 좋은 결과를 얻어왔다.
 
시장의 기존 사업자와 새로운 플랫폼의 관계처럼, 또 디자인 과정의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처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고 경쟁하면 공유경제의 가치를 제대로 실현하기 어렵다. 그래서 공유경제와 디자인은 서로 닮았다. 즉 공유경제에서 디자인이 중요하고, 디자인에선 공유경제적 태도가 중요하다. 둘 모두 적대와 경쟁이 아니라 환대와 함께함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이상적 목표의 실현은 녹록치 않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서 많은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경제적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복잡한 관계와 더불어 한정된 자원과 비좁은 시공간에서 많은 경제 주체들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공유경제든 뭐든 적대와 경쟁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의 플랫폼 사업처럼.
 
 
03) 새로운 가능성, 3.0
 
공유경제의 실현이 기술에 의지했던 만큼 새로운 기술이 우리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지도 모른다. 요즘은 디지털 세상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 혹은 메타버스라고 말한다. 나는 '메타(meta)'라는 말과 '유니버스(Universe)'라는 말에서 나름의 의미를 유추해보지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가상현실'이 무엇인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가상현실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가상현실은 구석기시대와 같은 먼 옛날에도 있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동굴벽에 자신들의 동물신을 그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제우스와 같은 새로운 신화 이야기를 만들었고, 기독교 등 종교에는 늘 사후세계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가상현실은 시와 소설 같은 문학작품에 구현된다. 영상이 등장하면서 영화매체가 가상현실을 대신하였고, 최근에는 게임이 대표적인 가상현실이다. 이렇듯 가상현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언제나 인류와 함께해왔다.
 
과거 가상현실 세계가 실재현실(Real reality)과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시공간 개념이다. 가상현실의 시공간은 아주 유연하다. 가상현실을 만드는 사람이 시공간 개념을 조절할 수 있다. 실재현실과 시공간이 유사할 수도 있고, 기독교처럼 시간 개념이 무한한 절대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공간이 없는 절대 시간만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기술이다. 과거 가상현실은 말이나 글() 혹은 한정된 공간의 그림에 의지했다. 때문에 가상현실의 접근이 한정되었고, 독자는 누군가 만든 가상현실을 일방적으로 소비하는 방식이었다.
 
최근 디지털 기술이 등장하면서 가상현실이 물리적으로 실현되었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가상현실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가상세계의 내용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이 두 번째 특징이다. 과거와 달리 현재의 가상현실은 사용자의 참여가 활발하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을 만드는 사람은 그 실재현실에서 통용되는 시청각의 감각적 배경과 큰 틀의 사회적 규칙을 제공할 뿐이다. 나머지 내용은 참여자들의 활동으로 만들어진다. 덕분에 사람들은 실재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가상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다.
 
가상현실의 한계는 감각이다. 가상현실 경험은 시각과 청각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딘가. 사람들은 시청각으로 구현된 가상현실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안의 시공간을 마음대로 조작한다. 이 가상현실에 연결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점차 가상현실은 실제 현실 속 또 하나의 현실이 되어 버렸다. 즉 우리는 종교와 이념 등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함께하는 또 하나의 세계를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가상세계, 메타버스다.
 
그런데 모든 현실 세계에는 권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시공간이 자유롭다고 돈과 힘을 추구하는 욕망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다. 실재현실의 역사에서 보았듯 가상현실에서도 점점 양극화가 진행된다. 이 양극화는 현실세계와 연동된다. 지금 주가 시장에서 상위에 있는 기업 중 상당수가 디지털 플랫폼이다. 현재 플랫폼 사업자들은 새로운 재벌과 권력이 되었다. 돈을 모으는 경제력과 규칙을 만드는 정치력을 한꺼번에 쥐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현실세계의 영토국가를 초월한다. 가상현실 세계의 새로운 국가를 창출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듯 실재현실과 가상현실의 시공간 개념 차이가 있기에 우리는 두 세계에 동시에 살아갈 수 있다.
 
디지털 기술이 등장한 지 채 100년도 안되었다. 디지털 기술은 웹 1.0에서 2.0, 3.0으로 매일매일 새로워진다. 초기 디지털 기술인 웹 1.0은 메일(mail)과 같은 일방적 서비스였다. 20세기 들어와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처럼 상호 교류가 가능한 거대 플랫폼이 등장했다. 이를 웹 2.0이라고 한다. 최근 디지털 기술은 다시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다. 기존의 중앙화 된 플랫폼과 다른 분산된 플랫폼 방식이다. 이를 웹 3.0 혹은 블록체인 기술이라 말한다. 나는 새로운 기술을 잘 설명할 능력은 없다. 다만 이 기술로 인해 기존 가상현실 세계에 다시 혁신의 바람이 불 것이란 생각이다.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메타버스의 세계다.
 
새로운 디지털 가상현실 세계는 기존의 연결방식과 다르다. 허브가 되는 중앙을 거치지 않고 다양한 주체들이 직접 연결된다. 덕분에 연결이 무한대로 증폭된다. 그래서 블록체인 기술은 경쟁과 적대아니라 함께와 환대를 강조한다. 과거 중앙집권적 은행이나 정부가 아닌, 또 거대 플랫폼이 아닌, 완전히 탈중앙화된 분산된 시스템을 강조한다. 영토국가나 기존 플랫폼처럼 집단의 경계도 분명하지도 않다. 다양한 경계가 상호적으로 공존공생한다. 경계 안의 규칙 또한 기존 법률처럼 딱딱하지 않다. 참여자들이 상황에 맞게 규칙을 바꿀 수도 있다. 과거 몇몇 고대 그리스인들이 꿈꾸던 직접 민주주의가 기술적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앞으로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점점 가속화된다. 물론 우리는 상당 시간 시공간과 경계, 규칙이 딱딱한 실재현실 세계와 시공간과 경계, 규칙이 유연한 가상현실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유경제 대한 개념과 범주의 확장을 계속 목격하게 될 것이다. 공유경제, 함께성의 흐름은 이미 정해졌다. 이젠 거스를 수 없다.
 
 
04) 디자인의 역할
 
디자인은 예술과 공예에서 분리되었다. 생산방식이 수공예에서 공장식 기계로 전환되고 시장이 전 세계로 확대되었다. 전통 예술과 공예의 분업도 새롭게 변화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이 분야가 새롭게 형성되었다. 수공예가 줄어들고 기계 생산이 확대되면서 디자인 분야도 성장했다. 분업의 과도기가 지난 지금, 공예 활동은 크게 축소되었고 디자인 분야는 크게 확대되었다.
 
다양한 문명과 문화가 연결되어 복잡하게 얽히면서 온갖 사회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부분 복잡하고 연결되고 열린 문제였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고도의 분업이 요구되었다. 예술과 디자인 분야도 문제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모든 전통을 부정한 예술은 비판적 입장이었고, 새로운 규칙을 고민하는 디자인은 해결자의 태도를 취했다. 점차 예술은 문제를 제기하고 디자인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문제를 대하는 역할이 나눠진 셈이다. 결과적으로 디자인은 근현대에 등장한 각종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형성된 분야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디자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주 흥미롭다. 바로 함께성을 문제 해결의 척도로 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 교육은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구조다. 함께성을 위한 교육 방향을 찾으려면 근대 이전으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경제학자 강수돌의 책 나부터 교육혁명에는 인디언 아이들과 백인 아이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디언 아이들이 백인 학교에 전학 왔다. 선생님이 시험을 볼 때니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고 나갔다. 선생님이 돌아오니 백인 아이들은 책상에 가방을 올려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고, 인디언 아이들은 둥글게 모여 앉았다. 선생님이 인디언 아이들에게 왜 이렇게 있냐고 물어보니, 아이들은 "저희는 어려운 문제에 닥치면 모여서 머리를 맞대라고 배웠어요"라고 대답했다. 두 집단은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다.
 
인디언 아이들 이야기는 우리 시대 교육의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우리 시대에 적합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내는 홀로 경쟁력을 갖춘 개인을 양성하는 과정일까. 아니면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내는 함께성의 지혜를 갖춘 개인을 양성하는 과정일까. 전자의 방식으로는 앞서 타다와 택시업계의 갈등처럼 공유경제에서 일어난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없다고 생각한다. 둥글게 모여 머리를 맞대는 후자의 방식으로 가야 그나마 타협이 될까 말까다.
 
나는 이 가능성을 디자인 교육에서 발견한다. 기존 교육은 정답 맞히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은 답을 갖고 있고, 학생은 그 답을 배우거나 먼저 답을 맞히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반면 디자인에는 정답이 없다. 선생님조차 디자인 문제에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디자인 교육은 늘 대화를 중시한다. 선생님은 먼저 학생들에게 문제를 제안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과제로 낸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제시한 규칙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문제 해결 방안을 가져온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각자 가져온 해결책들을 함께 검토(크리틱)하면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선생님만이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게도 배우게 된다. 수업이 거듭되면서 각자의 해결책들은 한 발씩 나아간다. 마지막 수업에서는 나름대로 발전시킨 다양한 해결책을 전시하며 마무리된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클라이언트와 갈등하지 않고 나름의 해결책을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자인 교육을 받으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갈등과 대화 그리고 타협의 과정을 내면화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교육을 이수한 디자이너들은 결국 상대방의 의견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기본적으로 '함께성'의 태도를 갖게 된다. 즉 디자이너는 다양한 의견에 대한 열린 태도를 갖고 복잡한 난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다. 나는 이 점이 공유경제에서 말하는 '함께성=다수성'의 실현에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다.
 
기술이 허락한 공유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적대 경제로 기울고 있다. 그 이유는 경제 주체들이 여전히 다양성과 함께성을 수용하지 못해서이다. 기존 경제시스템 속에서 경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선입견이다. 사실 '함께성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함으로써 더 좋아진다는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디자인 교육이 이런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공유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디자인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 대학에서 진행되는 전문적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교육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함께성'이란 태도를 갖기 위해서 디자인 교육은 반드시 확대되어야만 한다. 인간을 위한 디자인(빅터 파파넥)의 첫 문장처럼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시대가 온다면 공유경제의 실현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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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그래픽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이다. 그린디자인을 공부하면서 디자인이 사람과 세상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현재 경향신문과 국민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며 디자인 공부 공동체인 디학(designerschool.net)’에 참여한다. 쓴 책으로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인가-X(스테파노 반델리, 2012) 런던에서 온 윌리엄모리스-그는 왜 디자인의 아버지인가(지콜론북, 2014) 역사는 디자인된다(민음사, 2017) 아빠 디자인이 뭐예요(이숲, 2020), 아름.다움,(이숲, 2022)이 있으며, 이 외 다른 백년, 디자인 평론, 경향신문, 등 다양한 매체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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